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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 V 페라리] - 권위적이고 위선적인 미국 기업 문화에 일침을 가한 켄 마일스의 위대한 질주 스크랩
2020.03.16 16: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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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제임스 맨골드

주연 : 맷 데이먼, 크리스찬 베일

우리 집엔 남자들의 질주 본능은 없다.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날씬한 스포츠카에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그 스포츠카에 올라타서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쾌감을 원한다. 뭐, 내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암튼 대부분은 남자들은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니다. 일단 나는 어렸을 적부터 차멀미가 너무 심해서 자동차라면 질색이다. 커서는 차멀미가 사라졌지만 운전을 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아 될 수 있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 노력한다. 스포츠카? 질주본능? 난 그딴 거 단 한 번도 원한 적이 없다.

나를 닮아서일까?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린 남자아이들은 누구나 자동차 장난감을 좋아한다고 하던데, 아들은 그러지도 않았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아들의 사랑은 한결같이 공룡에 쏠려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포드 V 페라리]라는 레이싱 영화가 개봉했을 때 나와 아들은 시큰둥했다.

뒤늦게 [포드 V 페라리]가 기대작이 된 이유

애초에 늘씬한 스포츠카에 관심조차 없던 내가 갑자기 [포드 V 페라리]에 관심이 생긴 이유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고 나서부터이다. [포드 V 페라리]는 작품상 등 4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고, 그중 음향편집상과 편집상을 수상했다. 이를 지켜보며 이 영화가 단순히 남자들의 로망인 레이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닌 작품성도 지닌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제서야 [포드 V 페라리]를 극장에서 놓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사정은 아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들과는 달리 스포츠카에 관심이 많은 아들의 친구가 [포드 V 페라리]를 보고 나서 아들에게 엄청 재미있다며 적극 추천을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들도 뒤늦게 [포드 V 페라리]가 보고 싶다고 선언한다. 결국 지난 일요일 나는 Seezn에 내 피 같은 TV 포인트 5,500점(부가세 포함)을 투자하여 [포드 V 페라리] 관람을 끝마쳤다. 영화를 보고 나니 5,500점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건 단순한 레이싱 영화가 아니다.

나는 [포드 V 페라리]가 미국 패권주의를 등에 업은 레이싱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다. 영화는 1960년대 매출 감소로 위기를 맞이한 미국의 거대 자동차 회사 포드의 상황을 보여준다. 포드는 판매 활로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의 페라리와 합병을 추진하지만 모욕만 당한 채 물러선다. 이에 헨리 포드 2세(트레이시 레츠)는 르망 대회에서 페라리를 이길 수 있는 스포츠카를 만들라고 지시하고, 르망 대회 우승자 출신인 자동차 디자이너 캐롤 셸비(맷 데이먼)와 고집불통이지만 최고의 레이서인 켄 마일스(크리스천 베일)를 영입한다. 셸비와 마일스는 힘을 합쳐 최고의 스포츠카를 만들어내고 페라리를 꺾고 르망 대회를 우승하며 '미국 만세'를 외친다. 이것이 내가 예상한 [포드 V 페라리]이다.

하지만 [포드 V 페라리]는 그렇게 뻔한 영화가 아니다. 미국 대 이탈리아로 진행될 것만 같았던 영화는 어느 순간 포드의 보수적인 경영진과 마일스의 대결로 넘어간다. 포드의 경영진은 고집불통인 마일스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그를 배제하려 하지만, 셸비는 마일스 없이는 르망에서의 우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결국 셸비는 중간에서 헨리 포드 2세를 설득 마일스가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포드 경영진은 마일스 우승을 방해한다.

보수적인 미국 기업 문화에 대한 일침

참 이상하다. 포드의 원래 목표는 페라리를 꺾고 르망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목표의 최대 적은 페라리가 아니다. 바로 포드 자신이다. 그들의 기업 총수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기업 문화는 사사건건 셸비와 마일스의 질주를 방해한다. 셸비와 마일스가 이러한 내부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르망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권위주의에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포드의 자동차가 르망 대회 1, 2, 3위를 차지하자 부사장이 마일스에게 속도를 줄여 3대의 차가 나란히 결승점에 들어오라고 지시하는 장면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났다. 이건 르망 대회를 보러 온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그들이 원한 것은 포드의 영광이 아닌 지옥의 레이스를 견딘 레이서의 무한 질주일 텐데 말이다. 그저 포드를 홍보하기에 좋은 그림을 위해서라면 스포츠맨십 따위는 휴지통에 버려도 좋다는 포드 경영진의 거지 같은 인식을 보고 있노라면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내 앞에 그따위 아이디어를 낸 부사장이 있다면 주먹을 날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진정한 승자는 포드가 아닌 마일스이다.

결국 포드의 엉뚱한 지시로 인하여 마일스는 우승을 빼앗긴다. 하지만 아무도 마일스가 패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의 진정한 패자는 페라리도, 마일스도 아닌 포드이다. 스포츠의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고 모든 것을 자본주의적으로 재단해버리는 그들의 오만. 이 영화의 제목은 진정 '포드 V 페라리'가 아닌 '포드 V 마일스'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32분이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남자의 로망을 담은 레이싱 영화도 아니고, 낯 뜨거운 미국 만세를 외치는 미국 패권주의 영화는 더더욱 아니라는 점에서 [포드 V 페라라]의 가치가 드러난다.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순수한 열정, 그 순수한 열정을 고집불통이라 치부하는 권위주의적인 미국 기업 문화에 대한 일침이 담겨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켄 마일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감동을 만들어낸다. 특히 켄 마일스가 만장일치로 미국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는 마지막 자막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작은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내게 여운이 남는 또 한 편의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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